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4.1.9

최철미 2014. 6. 15. 13:37

(1.9)
“You can do what?" 하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난 그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난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결국 대답을 못하고 말 것이다. 왜냐면 난 정말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쓸데없는 사고뭉치들의 결정체인 나. 목적도, 꿈도, 이상도 가지고 있지 않는 나. 살아가는 나날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큰소리 칠 수 있을까? 후, 오늘부터 다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빠는 “어디 며칠까지 버티나 보자”고 했다. 그렇게 밖에 말해줄 수 없는 걸까? 원망을 했지만, 사실 배우다 말고, 배우다 말고…. 변덕이 심한 내게 진저리가 난듯 한 말투. 하는 수 없지. 내 손으로 빚어낸 일이니까. 본격적인 lesson은 13일부터였다. 피아노를 배우기로 결심한 것도 집안에 있으면 공부하라는 아우성 때문이었다. 차라리 학원에라도 다니면 잔소리가 줄어들겠지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나라는 존재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판단밖에 내릴 수 없는 걸까? 인간들은 그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간단 말이야. 창문너머 별이 보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세고, 세고, 또 세어 봐도 끝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중에는 누워있으면 가장 환하게 보이는 별이 하나 있다. 나도 그 별처럼 흔한 별 중에서 흔하지 않고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이 되고 싶다. 그러나 단지 요망사항 일 뿐…. 아, 울적한 마음에 피아노를 두드린다. 그러나 오빠의 “조용히” 하라는 찢어질듯 한 소리에 중지된다. 후.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세상은 없을까? 방학숙제는 산더미 같이 쌓여있는데 진전이 없고…. 책을 펴도 마음은 바깥으로만 줄달음치고 있다. 방학이란- 적어도 나같이 게으른 사람들을 더 나태해지게 하고, 몸무게만 부쩍부쩍 늘어나게 하고, 배를 채우기 위해 돈만 더 들게 하고, 히스테리만 증가시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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