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4.1.2. - 판타지

최철미 2014. 6. 15. 13:50


그로부터 사흘 뒤. 그레이트 야아머드 백작의 장례식 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실눈 같은 이슬비가 가늘게, 소리 없이 대지를 적시고 있다. 하늘도 무참히 죽어간 영혼을 눈물로 위로해주려는 듯. 그도 그럴 것이 비는 장례식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층 더 울적하게 해준다.
(도대체 누가 아버님을 살해했을까.)

어머니 마리아의 전보를 받고 런던으로부터 급히 달려온 크리스틴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 그것이 그는 두려웠다. 어머니의 지나친 탐욕으로 인해 여자이면서도 남자의 행세를 해 왔던 그였다. 태어날 때부터 같은 또래의 사내아이들과 어울려 지냈고, 16세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대개가 그렇듯이 귀족집안의 상속자는 보통 아들이 된다. 그레이트 야아머드 가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작의 본처는 귀족이고 큰 지주인 그림즈비 공작의 딸이었다. 그녀는 몸이 허약했고, 결국 리이즈와 이사도라 두 자매만을 두었을 뿐. 이사도라가 3세 되던 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백작은 곧 새 부인을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크리스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녀는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지만, 대단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 해, 자식을 낳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딸이었다. 마리아는 결국 교묘한 술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크리스틴은 남자의 이름을 갖고, 남자의 행세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그것은 그 어느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심지어는 크리스틴의 아버지인 백작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크리스틴은 남자로서는 너무 아름다운 금발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두꺼운 레인코트로 감싸고 있는 가냘픈 몸매도, 가죽장갑 속에 숨겨져 있는 어여쁜 하얀 손도 남자의 행세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녀에게는 오히려 불필요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소나무 숲 쪽으로 뻗어있는 오솔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 중이다. 비는 촉촉이 그의 옷깃에 스며든다. 아니, 그의 허전한 마음까지 스며드는 것 같다. 그의 어깨까지 넘실거리는 젖은 머리에선 빗물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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