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4.1.1. - 윤경이의 판타지 소설

최철미 2014. 6. 15. 13:54

84년 1월 1일 <제 1부>

1914년 6월 28일.
일발의 총성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시스 페르디난도 일행이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서행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의 청년이 군중 속에서 뛰어나와 피스톨을 발사했다. 첫 번째 탄환은 황태자비의 복부에, 두 번째 탄환은 황태자의 머리에 각각 명중하여 그들을 쓰러뜨렸다. 흉한은 즉시 체포되었다. 그는 19세의 세르비아 청년 프린히프였다. 이 흉보가 비인에 달하자, 오스트리아 국민의 분노는 절정에 달하였다. 마침내,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 그 수도 벨그라드를 포격했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간의 싸움은 차례로 확대되어 러시아, 독일 및 프랑스까지도 그 물결 속으로 몰아넣어 이에 세계대전란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사라예보에서의 세르비아 청년이 발사한 피스톨의 소리는 실로 청천의 벽력이었다.

- 공포의 그림자.
같은 해 영국 런던의 어느 한적한 교외.
하늘은 끝없이 높아 보이기만 하다. 알맞게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미묘히 균형을 잡은 나뭇잎처럼 일 년에 불과 며칠 안 되는 날씨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의 그림자가 뚜렷이 땅바닥에 짧고 짙게 비치고 있다. 그 그림자는 생명이 있는 것처럼 거무죽죽한 모습으로 을씨년스럽게 숨 쉬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거대한 숲 바로 옆에는 그레이트야아머드 백작의 대저택이 조용히 서 있다.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저택이다. 그러나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의 그늘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이 웅장한 저택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갑작스런 여인의 가냘픈 비명소리가 평화를 깬다. 그것은 분명히 백작의 침실에서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리이즈(엘리자베드의 애칭)는 직감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긴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쥐고 2층에 있는 백작의 침실로 뛰어올라간다. 한 계단, 한 계단, 또 한 계단…. 그녀에겐 긴 드레스가 거추장스럽게만 여겨진다. 다 올라갔을 때에는 마치 몇 백 계단을 단숨에 올라온 것 같이 숨이 찼다. 어두침침한 긴 복도를 지나 맨 먼저 눈에 띠인 이는 하녀 이사벨이었다. 그녀는 백작의 침실 앞에 주저앉아 겁에 질린 채 벌벌 떨면서 침실 안을 무서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입속으로 뇌까리고 있었다. 리이즈는 애써 침착한 듯, 멀찌감치 떨어져 수군대고 있는 하인들에게 명령조로 말한다.
「이사벨을 제 방에 데려다 줘. 무엇보다도 안정이 필요할 테니까.」 하녀 몇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이사벨을 부축한다. 리이즈는 침실 안을 힐끗 쳐다본다. 백작은 바닥에 엎드려 있다. 그의 두 눈은 겁에 질린 것처럼 부릅 떠있고, 등에는 몇 개의 단도가 기묘한 형태로 꽂혀 있었다. 바닥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리이즈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 하느님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그녀는 백작의 모습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다. 또, 생각을 하는 것조차 꺼려졌다. 그녀는 조심스레 침실을 나왔다. 밖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에는 마리아와 이사도라도 끼어있었다. 리이즈는 마리아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픔의 빛이 역력했다.(가엾은 사람.)그러나 곧 리이즈는 시선을 돌려버린다.
「아버님은….아버님은 어떻게 됐어요, 리이즈?」 마리아의 입술은 파르르 떨린다.
「아버님은 돌아가셨어요. 살해당했습니다.」마리아는 흐느껴 운다. 오랫동안 쌓여온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이사도라는 제법 담담한 표정이다. 하인들은 웅성거린다. 마리아의 흐느낌은 리이즈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마리아, 괜히 슬픈 척 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당신에겐 더 잘 된 일이 아니에요?」 이사도라의 날카로운 비웃는 목소리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넌 어머니가 가엾지도 않니?」 리이즈의 신경은 날카로워진다. 그녀의 히스테리는 이사도라의 화장기 짙은 뺨을 철썩 갈기고야 만다. 이사도라는 적잖이 놀라는 듯싶더니, 곧 맞은 뺨을 어루만진다.
「리이즈. 난 이렇게 모욕을 주고도 살아남을 것 같아? 글쎄, 어디 두고 보자구. 마리아 당신도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두 분에게 악마의 손길이 뻗치고 있으니 말예요. 하하하….」그녀는 비웃음이 가득 찬 말을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남기고 간 웃음의 여운은 리이즈와 마리아의 가슴 속 깊이 파고든다. 그 여운은 기분이 나쁠 정도로 몸이 오싹해진다.
「어머니」먼저 말을 꺼낸 쪽은 리이즈였다.
「런던에 있는 크리스틴(크리스토퍼의 애칭)에게 전보를 치세요. 아버님의 장례식에는 꼭 참석해야 할 테니까요. 그리고…. 축하해요. 머지않아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겠군요.」리이즈의 의문모를 웃음에 마리아는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 때, 뚱뚱하고 나이 들어 보이는 하녀 하나가 리이즈에게 다가온다.
「엘리자베드 아가씨. 런던 경시청에서 경감나리가 오셨는데요. 아가씨를 잠깐 뵙자고 합니다.」
「알았네. 할멈.」리이즈는 뚱뚱한 하녀 뒤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자신을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마리아를 뒤에 남겨두고.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는 리이즈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녀의 좁은 어깨도 예전보다 한층 무거워졌음을 알 수 있다. 아버님의 갑작스런 죽음, 크리스틴의 상속, 마리아, 그리고 이사도라. 그녀가 해결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너무도 벅차고, 너무도 힘든 일 뿐이다. 그녀는 깨닫는다. 어떤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의 그림자가 자신, 아니 이 집안에 다가오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첫 번째 희생물은 바로 자신의 아버님 이였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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