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3.12.30

최철미 2014. 6. 15. 14:09

12/30

드디어 전주를 떠나는 날. 그들을 만나 탁구장으로 갔다. 시간이 갈수록 슬퍼지기 시작했다. 한아름 음식백화점으로 가서 통만두를 먹었다. DJ에게 Bonny Tyler의 “Total Eclipse of the Heart"를 신청했다. 호소력이 짙은 가슴에 무언가 와 닿는 노래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눈을 반쯤 감고 있을 때 성근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왠지 볼이 빨개졌다. 식사를 끝내고 “Lotteria”로 가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12시가 훨씬 넘어서 고속버스정류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4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차표를 사려는데, 망설이는 마음을 어찌하리오. 성근은 되도록 늦게 떠나라고 했다. 결국 6시 30분 차표를 샀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을 때, 성근이 내 옆자리에 앉더니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을 다해보라고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여자애들보다 진정한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난 내년 여름은 오기가 힘들 거라고 했다. 성근은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 알고 있다니? 난 “무슨 말이냐”고 반문했다. 그는〈미국〉으로 갈 것 아니냐고 했다.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을까. 결국 난 그에게 모든 일을 다 털어놓았다. 후-. 한마디 덧붙여서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날 싫어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다 알고 있었고, 또 네 행동에서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난 물었다. 내게서 슬픈 빛이 보이냐고. 두드려지냐고. 그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면서, 〈슬픔을 감추면서 명랑하고 쾌활한 네 태도가 좋다고〉했다. 난 몹시 행복했다. 그는 나보다 먼저 그 모든 사실을 알았다는데, 여태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신만 알고 있던 그 너그러움을 난 기쁘게 생각했다.  어제보다 더 친근감이 들었다. 더욱 성근이 좋아졌다. 난 또 한 사람의 같은 운명의 소유자를 발견한 기쁨에 내가 늘 꿈꾸던 이상을 그에게 말했다. “난 결혼을 하지 않을 거야. 내 남편이, 내 자식들이, 불순한 동기에서 태어나게 된 나로 하여금 불행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 집안의 불행으로 떠나지 않던〈이혼〉은, 그리고 그것의 영향은 나까지만 거쳐야해. 또 한 가지는 날 세상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예외의 인간으로 만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언젠가는 그들 위에 버젓이 서서 〈난 당신들보다 훌륭하오〉라고 소리치고 싶어. 그들의 비난과 멸시와 천대 속에서도 난 이렇게 훌륭히 성장했다고 말하고 싶어. 요망사항을 적은 것일지도 몰라. 단순히 생각에서만 그칠지도 모르고 어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수에 지나지 않지만.” 우린 다짐했다.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도 정치, 경제, 문화…. 어느 한 면도 발전하지 못한 이 나라를 우리가 이끌자고. 이끌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사람이 흔한 세상에서 우린 흔하지 않은 사람이 되자고. 난 몹시 감격했다. 날 생각해주는 이가 있었어. 성격도 비슷하고 운명도 일치하는…. Y보다 ― 이성 때문에 헤어져야만 하는 Y보다 더 좋았다. 솔직히 털어놓지 못하는 Y보다 친근감이 들고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온 S가 난 더 좋다. 아, 그러나…. 나도 엄마처럼 한 남자에겐 만족을 못하는 걸까? 하지만, S는 이성으로 돌려버리기 싫다. 여자들보다 친한 영원한 친구로 생각하고 싶다. Y는 한 때 믿고 의지했던 절대자로 독신주의자가 될 생각이다. 일부일처를 모범적으로 배신한 사람들처럼 비겁해지고 싶지 않다. 후-. 그러나…. 성근과 얘기하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6시 30분차가 왔다. 이제 이별이구나. 눈물이 두 뺨을 적셨다. 성근은 “또 와”라고 유리창에 써 보였다. 무척 고마웠다. 차가 막 떠나려는데 오빠가 뛰어왔다. 성근은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오빠라는 걸 알아떠나려는데 오빠가 뛰어왔다. 성근은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오빠라는 걸 알아채고 종성을 데리고 사라져버렸다. 선화만이 마지막까지 울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난 “울지 마” 라고 제스춰를 써가며 의사를 전달했다. 선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떠났다.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성근아. 선화야. 종성아. 꼭 다시 돌아올게. 몸 건강히 안녕” 몸이 피로해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대전에 도착했다. 하차를 해서 오빠와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오자 오빠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결국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오빠는“아무리 정숙하지 못한 엄마의 피를 타고 났다고 해도 14살밖에 안 된 애가 벌써부터 남자애들하고 놀러 다니냐”고 했다. 난 오빠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성근은 이성을 떠나서 진정한 친구”라고. 참아야만 했다. 두고 봐. “언젠가는 난 당신들의 위에서 당신들을 짓밟고 말테니까” 나. 〈나는 무엇이고 무엇이여야만 하는 가.〉사랑의 물빛이 든 소녀. 수줍어하는 그 모습. 혜은이의〈작은 숙녀〉를 들으면서. 나도 그 작은 숙녀중의 하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날 괴롭게 한다. 난 도대체 나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야하고 또, 그걸 어떻게 실행해야 할까? 단순한 복수. 그들 위에 서는 것. 그들을 짓밟는 것. 무엇을 도구로, 무엇을 어떻게, 까마득하다. 1983년도 꼭 하루를 남기고…. 이 허전한 마음. 이제 그만 자야할까 보다. 눈물이 흐른다. 왜? S가 보고 싶다. 선화도, 종성도,…,Y도. 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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