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3.12.24

최철미 2014. 6. 15. 14:18

12/24

Christmas eve 날. 예년보다 더 쓸쓸함이 깃든다. 별로 기쁘지도 않고…. 마음 한 구석 어딘가 허전하다. 지루함에 못 견뎌 피아노를 쳤다. 〈언제 가셨는데 안 오시나/ 한 잎 두고 가신 님아/ 가지 위에 눈물 적셔 놓고/ 이는 바람 속에 남겨놓고/ 앙상한 가지 위에/ 그 잎 새는 한 잎/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 외로움만 더해가네/ 밤새 빗소리에 지쳐버린/ 한 잎마저 떨어지려나/ 먼 곳이 계셨어도 피우리라/ 못 다 핀 꽃 한 송이 피우리라.〉슬픈 곡조다. 수미에게 전화가 왔다. 수미도 그리 기쁜 것 같지는 않았다. 엄마께서 편치 않으신가 보다. 난 희망을 간직하라고 말했다. “희망” 아, 그러나 내게도 실망과 좌절 뿐 이니…. 그에게서 전화가 오길 기다렸다. 그 편지가 뒤바뀌었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아 미칠 것 같다. 사랑의 고뇌처럼 달콤한 것은 없다는데. 난 오히려 죽을 것만 같다. 〈이별의 편지〉를 전해줬더라면 차라리 속 시원히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경솔했었다. 난…. 오빠. 난 오빠를 너무 사랑해. 나의 첫사랑! 달콤하고도 괴로운 사랑이었지. 우린 타고난 운명이 일치했어. 서로 알게 된 것도 기막힌 우연이었지. 난 왠지 모르게 오빠에게 친근감이 들었어. 오빠와 몇 번씩 만나기 시작할 때, 그 친근감이 이성관계로, 또 사랑으로 돌변해 버렸어. 난 어쩔 줄을 몰랐지. 오빠를 멀리했지만 한시도 떨어져 있으면 괴로움에 몸부림쳤어. 시대의 흐름에 역류하는 생활의 소유자였지만, 온갖 타락은 다 해본 인간이었지만, 나의 절대자가 되어 주었지. 하지만, 오빤 날 때때로 베이킹파우더를 잔뜩 넣은 빵같이 마냥 부풀어 오르게 하다가도 홀로 눈물을 짓게 하기도 했지. 오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지. 오빤 거의 매일 학교로 날 찾아왔지. 덕분에 전교가 다 날 좋지 않은 학생으로 생각하게끔 되어버렸지. 그러나 난 꺼리지 않았어. 너무 오빠를 사랑했기에. 하지만 사태가 달라졌지. 나도 오빠를 스쳐지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어. 난 머무르고 싶었어. 오빠 곁에 잠들고 싶었지. 그러나 세상은 그리고 신은 허락해주지 않았어. 너무 어리기 때문에 수줍은 나머지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못 건네 본 나의 첫사랑은 막을 내렸어. 남는 것이 없었지만 우린 이런 흐지부지한 상태에서 헤어져야만 했지. 오빤 날 좋아하지 않았는지도 몰라. 그러나 더 이상 내게 고뇌를 주지 말고 오빠만의 영원한 세계로 가버려. 오빠의 꿈과 이상이 실현되기를 간곡히 빌겠어. 난 오빠를 영원히 잊지 못 할 거야. 아니 잊고 싶어도 못 잊을 거야. 아 모든 것이 끝났어. 사랑의 축제는 막을 내리고 땅위엔 오색테이프만이 나뒹굴고 있는 거야. 오빤 정말 좋은 나의 절대자였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위험투성이의 결정체 였지만, 믿음직스러운 인간이었어. 아 결국 난 또 만족을 얻지 못했어. 나도 되돌아오지 못할 거야. 때때로 오빠에게 사랑을 받았으면 했지만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야. 어느 삼류소설의 제목처럼…. 가진 자 보다 못 가진 자를 사랑할 수 있는 포용력을 기르라던 오빠. 일부일처를 모범적으로 배신한 사람들을 이해하라던 오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오빠를 사랑한다고. 날 미쳤다고 하겠지. 뺨을 때릴지도 몰라. 아 오빠. 내 마음을 알고 있어? 언젠가 나의 성장에 있어 오빤 겉과 속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저력을 가진 제 3자라고 했지? 그렇다면 내가 오빠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이렇게 혼자 하소연을 털어놓아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는다. 적어도 크리스마스이브 날인데…. 거리는 조용하기만 하다. 소복이 쌓인 눈으로 하얗게 빛나면서 이따금 화목한 가정의 웃음소리뿐. 뭐가 그리고 즐거운 걸까. 난 이렇게 슬퍼하고 있는데. 오빠와 나. 울고 웃고, 싸우고, 화해하고, 가까웠다 멀어지는…. 간추려 요약하면〈공공연한 스캔들〉이었다. 그 유쾌하고도 남몰래 눈물짓던 나날들. 그 여름의 그리고 그 겨울의…. 지나가버렸다.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이런 바보. 울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너무 너무 그를 사랑했었다. 아 그가 보고 싶다. 지금도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을 그. 나도 어느새 그와 마주보고 깔깔거리며 웃고 있고…. 아, 윤경아 꿈 깨라, 꿈 깨!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런 소용이 없어. 훌쩍훌쩍. 텔레비전의 소음이 정신을 혼란케 한다. 그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아 열어젖힌 창문에서 차가운 냉기가 들어온다. 지금의 괴로움. 하지만 훨씬 나중에는 그것들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했던 것이 되겠지. 으~ 한 가족이 다 모였는데도 즐겁지가 않다. 다른 집은…. 불행만 가득 차 있는 집안에서 행복한 웃음을 찾으려는 내가 바보지. 내가 자꾸만 왜 이럴까? 매사를“희망”을 전제로 한 웃음을 찾으려는 내가 바보지. 내가 자꾸만 왜 이럴까? 매사를“희망”을 전제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모두가, 인간 모두가…. 그도, 나도…. 오늘 하루도 훌쩍 지나가 버렸다. 결국 전화는 오지 않았다. 아 오빠. 당신이 내 마음을 아주 조금만이라도 알아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오빤 나와 무척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사이엔 보이지 않는 유리벽들이 가로막고 있고. 오빤, 아니 그 어느 누구도 그 장애물을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슬픈 일이다. 오. 윤경아. 너의 인생은 꼭 이렇게,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걸까? 정말 인간은 참으로 불행한 존재가 아닐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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