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3.12.23

최철미 2014. 6. 15. 14:19

12/23

시내에서 옷을 사고〈시인과 나〉〈못다 핀 꽃 한 송이〉두 곡의 파퓰러 악보를 샀다. 피아노를 오래간만에 쳐보니 소리가 제대로 나질 않아서 오빠가 벤치를 들고 퉁탕거렸지만, 조율을 해야만 했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무너무 반가웠다. 그가 내게 말했다. “아직은 온실의 꽃으로 있어”라고. “넌 아직 피지 않은 꽃”이라고.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럭저럭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벨소리가 났다. 육감적으로〈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부풀어 오른 마음에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왔다. 일부러 겉으로는 본체만체했다. 괴로웠다. 난 꼭 이래야만 하는가. 나라는 한 존재 속에서 비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사탕으로 만든 부케를 내게 주었다. 너무 예쁘장했다. 편지를 건네주었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이별의 편지〉를 준 것이 아니라 접때 전해주지 못한 편지를 주었다는 걸 알았다. 내 자신이 너무 멍청했다. 하지만, 다행이다. 역시 이번에도 행운은 내 옆을 배회했다. 아, 그가 가고 난 뒤의 씁쓸함이란…. 정말 견뎌내기가 힘들다. 그와의 이별이 며칠 더 연장됐다. 좋은 현상일까? 그는 정말 날 좋아하는 걸까? 아,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싶다. 혼자만 끙끙 앓으며 모든 걸 다 짊어져야만 하다니…. 아니다. 몸을 사리는 비겁함을 그와 나누고 싶지는 않다. 난 어쩌면 좋을까. 이제 곧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될 사람. 난… 난 아직 어린가보다. 그의 온당한 대우를 받으며 그와 함께 거닐 때 까지는 아직 멀었다. 흐느낀다. 오! 하느님. 절 구해주옵소서. 마음이 흔들린다. 이것이“사랑”의 징조일까? 아, 오빠. 왜 당신은 내게 이런 슬픔만을 안겨주고 가야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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