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일기

1983.12.22

최철미 2014. 6. 15. 14:22

12/22

하루 종일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벨소리가 울릴 때 마다 얼른 뛰어가서 받았지만, 매번 실망을 했다. 초조했다. 분명히 오늘은 속리산에 가자고 했는데…. 눈발이 날리더라도 전화 한 통쯤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어제 못 만난 것이 후회스럽다. 그는 “후회할 일은 하지 말라”고 내게 말했는데. 그는 내게 너무 좋은 말을 많이 해주었다. 잊을 수 없다. 아, 이것이 여자의 마음일까. 사람들은 우릴 이해하지 못한다. 단순한 오빠와 동생간의 관계인데도. 하지만, 처음은 다 그렇게 시작한다는 오빠의 말. 정말 그럴까? 그러나, 그는 날 그저 동생으로만 생각해 주는 것 같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괴롭다. 〈순간의 시련〉일까? 아니면 〈성장과정의 일부분〉일까? 그는 말했다. 확고한 가치관의 정립의 에너지가 바로 “나”라고. 또, 자신을 스쳐지나간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사랑한 다고.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다. 언제나 예외인 그를…. 이것이 사랑일까?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짝사랑. 떳떳하지 못한 사랑. 지금의 내 심정은 마치 어떤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다. 아. 내가 여태까지 껴안고 달려왔던 것은 타인의 시선, 타인의 빈껍데기, 타인의 책임 없는 몇 마디 평가…. 그런 허접스러운 것들. 내 인생은 매순간 느끼고, 반응하고, 기뻐하고, 성내고, 잘 울면서 아직 해답을 풀지 못한 수학문제 같다. 큰일이다. 난 수학엔 자신이 없으니…. 난 그를 좋아한다. 그도 난 좋아할까? 도무지 그의 생각을 파악할 수가 없다. 그가 언제나 말하던 충격.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얘기해 준다는 그 무엇. 도대체 무엇일까? 그는 미래. 영원의 평야위에 떠도는 아침놀. 시간의 밤이 지나 우는 수탉의 울음소리. 그리고 변신하는 모습. 언제나 운명에서 외롭게 솟아 있다. 또, 자기본질의 마지막 말을 침묵하는 자.〈대답 불능〉이라고. 다른 사람에겐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치, 배에겐 기슭으로. 육지에겐 배로. 그는 내게 있어 인생의 거울과도 같다. 한번 용기를 내어서 말해볼까. 오빠의 두 눈에 내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 귀엽다고, 청순하다고, 순수하다고…. 밉다. 너무 밉다. 타인을 약 올리는 것이 취미인가? 나의 가슴은 이렇게 뜨겁게 타오르는데…. 애가 탄다. 그의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벌떡 일어났다가,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한다. 차라리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말했다. “우리는 깊은 인연으로 맺어졌다”고. 서로를 안다는 건 참 좋은 일인 것 같다. 이제 그와 헤어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아직 주지 못한 편지가 책상 서랍 속에 고이 있다. 찢어버릴까? 미칠 것 같다. 그는 모를 거야. 내가 자신 때문에 이리도 괴로워하는 것을…. 아니지. 그가 나보다 더 괴로워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아. 인생이란 이런 식일까? 난 아직 모든 면에 있어 아주 미미한 그 무엇에 지나지 않나보다. 언니만큼이라도 성장했으면 좋겠다. 자기의 일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컸으면 한다. 그러나 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어떤 절대자를 가질 만큼 크지 못했다. 매사가 타인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힘들다. 내가 성년이 되면 오빠에게 말하고 싶다. 아주 큰 소리로. 그가 뭐라고 하던지 상관없다. “난 오빠를 사랑해”하고. 아 요망사항을 적은 것일까? 한심하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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