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낙서장

낙서장-p.10

최철미 2014. 6. 22. 07:19

- 형.
왠지 지금 만년필을 들면 건방져질 것 같아. 모르는 사람들의 인생에 대해 아무렇게나 얘기하고 싶어. 그네들 온통 치기가 어린 현실, 그 마지막 종점, 그리고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이상을. 또 하날 입에 물면서….
나는 자주 어울려 한껏 즐기고, 마시고, 그럭저럭 호젓이 앉아 세상을 비웃고, 의리도 있고, 집을 나가도 반겨줄 사람이 요기조기 있는 듯 하고, 그러다가도 어느 틈엔지 난 혼자 괴로워해. 무엇이 축복이었는지… 슬퍼 훌쩍이긴 난 너무도 커버렸어. 견디기 힘들어, 너무나도 힘들어, 시간이 이대로 멈추지 않으면 이 밤의 하늘마저 무너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야. 관념에서 여태 생소했던 무한한 기대감이 엄습하면서 한없이 짓밟아. 그저 어쩔 줄 모르고 그 억압 속에 점점 초조해져만 가고 있어. 그리고 두려움에 간간이 훌쩍일 뿐이고….
오, 하늘이시여.
너무, 나는 너무 울어. 잠 못 이루는 밤엔.
마구 파헤쳐진 모습이 싫어. 흔한 길가에 우뚝 선 가로등처럼, 스치는 사람들마다 무심히 기대거나, 걷어차거나 혹은 모르는 체 지나버려. 한심해. 눈물이 마르면 한심해. 그러다가 지쳐버리면 그만이야. 아, 몸이 나른해져. 누구하나라도 옆에 있어주질 않으면 혼자 힘겨워 져. 이리저리 종점에서 종점으로 방황할 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것뿐이고, 누가 그랬던가, 말 없는 나의 지극한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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