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글모음/작은 딸, 윤경이의 낙서장

낙서장-p.8

최철미 2014. 6. 22. 07:22

- 왠지 그 옛날 때 묻은 소설을 읽다가 엎드려 울던 때가 그리워진다. 자정이 넘기를 기다렸다가 겨우 만년필을 들고 골똘하던 갓 넘은 십대가 그리워진다. 딴에는 첫사랑이라 울고, 웃다가, 성내고, 기뻐하고, 또 토라지고…. 오로지 동경과 애틋함이 파란 잉크 속에 여려졌다. 잊었다가도 가끔 어른거리면 주고받던 그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꿈과 이상을 차마 내던질 수 없는 게 심정이다. 한참동안 떠돌아다니던 불티 속에서 나는 슬며시 두 눈을 훔치고 만다. 카사블랑카가 은은하던 그 음악 감상실, 유쾌했던 기차간의 웃음소리, 몇 시간이고 떠들어대던 이해 불능한 철학, 삐죽거리는 입을 얼려주던 그 손길, 왜 그리 얄미웠는지.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 같다. 건물 꼭대기서 가만히 등불을 헤아리던 그 따스했던 포옹이며, 왠지 마음이 커 가는 걸 두려워하던 떨리는 목소리, 한 가닥 피워 물면 반드시 껌 하나 건네주던 낡은 연습장은 오래된 낙서들로 가득 차 있었다. 스스로 자위하기를 서로에게 빼놓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저 스쳐가는 세상의 흔한 사람들로 새벽녘까지 빗 거리를 걸어가기도 했다. 무의미한 만남에 낙심했지만 한 번이라도 웃어주질 않으면 혼자 힘겨워 어쩔 줄 모르던 나. 그 마지막 한 접촉을 잃지 않으려고 자신을 책망했던 나. 멀리 떠나가더라도 고향을 잊지 말라며 꽉 쥐어주던 주먹이 서글펐다. 아름다운 회상들은 더럽혀진다. 돌아갈 수 있을까. 차라리 허공을 헤매던 그 유리벽 속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오, 잊혀진 듯 갈망합니다.

- 펜이 닳는 한이 있어도 누구라도 내 앞에 나타나주면 애써 울지 않을 것 같다. 그리움이라면 차라리 내가 미워진다. 어쩜 나는 외로워하는지. 홀가분한 맘으로 웃어줄 때 눈물이 가득 고인다. 사랑하고프다. 얼어 붙이, 꽁꽁 얼어붙어 녹일 수 없을 것 같은 낙심이 접어든다. 꼭 껴안고 히히덕거릴 수 있는 젊음이 내게 있었으면…. 한심해. 눈물이 한심해진다.

- 햇빛 닿는 그 곳까지 무작정 걸어가고파. 차라리 길을 잃는다면 좋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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