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최세훈/아버지의 원고 모음

세대 - 임택근 아나운서의 정치 입문 사유서 - 우리 아버지께서 대필해 주신 글

최철미 2014. 7. 27. 13:27


(이 글은 아버지의 직속 상관이었던 임택근씨를 위해 아버지가 대신 써 준 원고이다.  임택근씨는 1970년대 초에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총선에 나간 적이 있다고 한다.  200 자 원고지에 볼펜으로 쓰신 원고이다.   이어지는 원고가 더 있을 것 같은데 44매밖에 없다.  방송 원고도 아닌데, 왜 우리 아버지한테 써달라고 했을까......)


오분의 1세기동안 나는 시간을 쫓고 시간에 쫓기는 무한궤도위에서 청춘의 기념비를 방송에 세웠다. H. 켄트릴이 지적한 바 “스윗치 하나로서 세계적인 관심을 갖게 되는” 현대적 미디어에서 나의 직역은 진선미의 전달자, 조국어의 수호자, 그리고 사상전의 첨병이었다.

대중의 판단적 측면을 창조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보유한 방송매체는 역사의 격랑을 헤쳐 나가야 했던 우리나라에서, 우선은 휴전 없는 전파전의 기수였고 다음으로 본연의 기능인 국민계도, 문화향상을 위한 사회적 공기였다.
우리는 격동하는 역사의 싸인 웨이브를 타 넘고 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집산지라고 할 매스 컴뮤니케이션의 첨단에서 역사의 원점을 응시하며 목격자요 증인으로 살아온, 켤코 아웃사이더일 수 없는 나의 눈은 언제나 현실을 투시했다.
전통있고 안정된 사회의 풍조가 몬슨에 실려 이 아시아적 정체성의 풍토에 이식되었을 때 무질서와 혼돈의 잡초가 먼저 자라지 않았는가?
정치적으로 외식과 나열의 곡예가 진실을 가리고 사회적으로는 경망과 허식의 표기류가 휩쓰는 그 전형적인 풍매현상을 나는 다음과 같이 개탄한 일이 있다.
“지식인과 대중이 함께 추구해야 할 최대공약수적 이데아가 과연 무엇일까? 지식인은 방황하고 대중은 유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느 계층이든 무엇이 당위인가를 부르짓는 구강운동만은 활발하다. 당위는 실행에 옮겨지지 않을 때 교양서와 함께 곰팡이가 쓸거나 구호로서 공전할 뿐이다.
얼굴이 둘 달린 괴수 야누스처럼 입으로 당위를 외치고 손으로 실리를 더듬는 그릇된 프래그마티즘에 우리들의 비극은 번식된다.
하나의 성곽이 축조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대석이 팔요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대석이 필요하다고 역설할 뿐, 돌을 옮기는 작업에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면 누가 성을 쌓을 것인가? 그리하여 무방비의 허점이 노출되고 마침내 그 벌어진 구멍 사이로 홍수가 밀어닥칠텐데도 곧 해가 기울어져 버리고 말 저녁노을 같은 유예 속에서 사람들은 오늘만을 긍정하고 산다.
신념은 산도 움직인다는 데 지금은 신념이 들어앉을 자리에 공리를 대입하고 사는 신념부재의 시대이다. 

(1968년간 청오지 소재 <나목선생> 중에서) “

어서 이 이념의 혼돈 위에 코스모스가 피어 혁명의 정신적 결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절실한 비원이 나의 그와 같은 회의의 바탕에 깔려있었지만 그 회의는 입으로 애국을 외치고 행위로는 나라를 등지는 대상들을 의식한 것이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애국이 언어로만 횡행하고 있는가?
정치학자는 전근대성의 탈피를 주장하고 경제학자는 후진구조의 병폐를 지적할 뿐 명확한 지도 원리를 스스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애국인가 하는 방법과 수단을 따지기 전에 나는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에 충실 하려했다. 오늘날 확대와 분화로 치닫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각자가 각기의 분야에서 그 소임을 완수하는 것이 곧 애국과 직결되는 것은 아닐까?
전란 중 군복을 입고 제4전선에 뛰어든 나는 휴식없는 대열 속에서 이십 년을 보냈다.

안으로 변전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진실을 광파하고, 밖으로는 국위를 어깨에 걸머진 올림피아드에서 또는 단일 팀의 조정경기에서 혹은 개인의 승리가 국가의 영광과 직결되는 빅 이벤트, 타이틀 매취에서 나는 전파에 눈물을 흩뿌리며 목메도록 세계속의 코리아를 보도했다.

때로 정열적인 주관자로서 때로는 냉철한 객관자로서 사실을 보도했던 나의 활동이 이나라 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나는 헤아리지 못한다.
반대급부를 계산하지 않고 나는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나의 길을 걸어 왔을 뿐이다.

“방송만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라는 파라독스든 “애국심을 불러 일으킨 입씸”이라는 과찬이든 전진을 멈추게 하거나 더디게 하지는 않았다.
자기완성을 위한 끊임없는 연마 속에서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일반을 투시하며, 변천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말을 잘 하는 것은 어쩌면 천직의 자질일른지 모르나 옥석 같은 언어의 구사는 진실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속에서만 가능하다.

언어는 사상을 구사하는 기구, 나의 사상의 기조는 오직 한국인이라는 순수의지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었다. 사람은 그의 긴 인생의 역정을 통해서 언젠가 개안을 한다.
이른바 인간사에 에폭크 메이킹이 이루어지는 경향인데 그것이 나에게는 10년전에 왔다.

권력구조에 변동이 있으면 개성의 권위가 부정되고 그 가치가 해부대위에 올려지게 마련인가?
1960년 4월은 엘리엇트의 시 대로 <잔인한 달> 이었다.
이른바 반민주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무분별한 정치의 광풍은 사람들을 제2차의 유배지로 휘몰았다.
맹인들도 데모를 하러 거리로 나왔던 그 혼미의 계절은 나에게도 질식할 것 같은 협곡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껍질을 깨는 생성의 아픔이었는지 모른다. 마침내 그날은 왔다.

스탠드에 서 있다가 링으로 뛰어든 그 개안의 날을 방송의 측면사로 엮은 <증언대의 앵무새 (최세훈 저) > 는 다음과 같이 개구하고 있다.
“출전일은 왔다. 5월 18일,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의 혁명지지 데몬스트레이션을 따라 6시간, 얼굴을 씻지 않고 밥도 먹지 않은 그는 22관의 몸을 트레일러처럼 끌며 거리를 포효하고 다녔다. 휴화산은 드디어 분출했다. 출구가 막혔던 울분이 폭발했다. 새로운 태양을 찬미하는 그의 박진의 목소리에는 부조리의 세대를 파묻고 어둠을 살라먹는 한줄기 광망이 번뜩였다.
“수고했오.... 군사혁명을 범국민적인 혁명으로 만드는데 공을 세웠습니다.”
전투복에 썬그라스를 낀 장군의 체온이 손가락을 짜릿하게 점화하자 새로운 생명력이 활활 타오르는 연소음을 그는 온몸으로 들었다... “
5.16 군사혁명과 국민대중을 연결하는 목소리의 가교를 마침내 이룩했다는 인식을 하는 순간, 방관자로서 오래 감겨있던 눈이 번쩍 뜨이고 나의 내부에도 변혁이 일어났다.
“혁명은 인류의 각성이다. 혁명은 어떠한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 라고 갈파한 손문은 그것을 성공시키려면 50년도 백년도 걸린다고 말했다.
그렇다. 5.16은 필연적인 것이고 또 국민혁명으로서 우리들이 가꾸어갈 위대한 역사인 것이다. 영시의 횃불에 불을 당기던 전야, 몇몇 혁명 주체들은 새벽 다섯시, 격문을 알리는 나팔수로 나를 앞장세우려는 계획을 검토했으나 미래있는 젊은이를 위험한 분수령에 세워서 안된다는 신중한 배려 끝에 철회했다는 비화를 거사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조국근대화를 꽃피우며 성장하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위험한 분수령이 아닌 고난의 좁은 문 앞에 세워졌다.
이 계획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결단코 철회될 수 없다.

70년대의 입구에서 국민의 한결같은 여망은 안정과 번영으로 집약된다 하겠다. 50년대를 혼란기, 60년대를 통제기로 본다면 다가온 70년대는 혼란과 통제가 조화된 완성의 단계로 보는 비젼이 있다.
더욱이 70년대 국민의 의식구조가 근대화해서 의회정치가 개화하는 년대로 대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과 등을 맞대고 있는 하나의 절망-- 기성의 정치인과 기성의 전근대적인 정치방식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수 없다.
여기에 새 인물 새 정책을 찾는 시대적요구가 있음을 나는 보았고 때묻지 않은 정치인이 출현해서 정치풍토를 정화하고 쇄신해야할 재정비 재수습단계가 이제는 도래했다는 소리없는 절규를 나는 듣고 분연히 정치일선에 나설 결의를 굳혔다.
그것은 마치 신춘 원단에 단정히 먹을 갈아 연초 휘호를 하는 엄숙한 자세와 상통하는 것이다.
지난해를 보내는 진솔한 자성속에서 1년지계를 시작하는 그러한 새로운 기분으로 기성의 혼탁한 정치풍토의 물결을 여과해서 거기에 샘물처럼 청신한 뉴벨 버그를 형성하려는 일념으로 나는 정계에 나섰다.
나의 재산은 정열과 의지와 실천력이며 나의 긍지는 정치에 관한 한 동정녀와 같이 무구하다는 것 뿐, 이웃나라의 탤런트 oooo 와 같이 대중의 인기로 얻어진 지명도에 의지하거나 특정정당의 후광에 힘입으려는 의타심은 추호도 없다.
오늘날의 대중사회에서 정치가 정치인의 독점물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데도 정계에 제일보를 디디자 맨 처음 닥쳐온 저항파는 정치의 문외한에게 어떻게 국사를 맡길 수 있느냐는 일부의 의구심이었다.
그러나 이나라의 정치도의의 타락과 정치의 전근대성의 책임이 거의 직업정치인에게 있음을 볼 때 나는 정치의 아마추어인 것이 기쁘다.
승패에 집착하고 때로는 그것을 흥정의 도구로 삼는 프로페셔널 보다는 정정당당히 페어 플레이로 임하는 아마츄어 정신이 얼마나 고귀하고 깨끗한가.
정치의 프로페셔널리즘을 지양하고 아마츄어리즘을 정립하기 위해서 나는 정치초년병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러한 스포츠맨 쉽을 나는 의회정치에서 구현하고 싶다.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공약수를 파악하고 거기에 자기기능의 공배수를 풀러스한다는 대전제는 대중을 포용해야하는 정치가에게나 다른 직업인에게 공통으로 통용되는 원리이다.
그런데 위로는 국가수장에서부터 아래로는 영세민에 이르기까지의 광범한 계층을 대상으로 위안과 오락을 제공했던 나의 직업이 때로 비판대에 올려지는 것을 나는 듣는다.

스타 덤에 오른 인기인이 정치에 적극참여함으로써 정치를 희화화 하려는 것이냐? 라고 말하느 사람들에게 정치가 그처럼 고답적이고 아카데믹한 것인가라고 나는 반문하고 싶다.
“정치인이 만화의 소재가 되는 것은 뱀장어가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윈스턴 처칠의 함축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한국의 일부 기성정객들은 어떤 의미에서 제일급 연예인일른지 모른다. 여든 야든 목적을 위해서는 권모술수를 떡 먹듯하는 마키아벨리의 제자이면서 입으로 양심을 운운하고 얼굴에 위선의 베일을 쓰는 일류 탤런트가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정치는 쇼라고 자책하면서도 자당과 자파의 이익을 위해서는 오버 액션을 서슴치 않고 때로는 적과 야합해서 국면을 유도하려는 공동 연출이 협상의 미명하에 얼마나 횡행하고 있는가?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일 수 있다는 가변성을 나는 배제하려 하지 않지만 카멜레온처럼 자주 변하는 고질화된 생리와 국민을 우롱하는 연극에 우리들 관객은 지쳐있다.
나는 서민 대중과의 오랜 교통에서 그들의 심리의 심층에 잔재해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울고 그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동류의식이 몸에 배어있다.
따라서 그들의 권익이 어떤 저변에서 다듬어져야 하고 어떤 사변에서 바로 세워져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체득해 왔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과제로 삼고 있다.
1970년 5월 7일 정당의 공직에 임명된 날, 취임연설에서 나는 실천하는 정치를 공약하고 그 기조로서 다음과 같이 숙명론에 비판했다.
“운명이란 두 글자는 패배자가 만든 말입니다. 승리자는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용기. 처녀항해의 닻을 올리는 나 자신에의 굳은 다짐이며 상황에 추종해서 무기력하게 체념만을 일삼는 패배주의에 대한 경고였다.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파이어니어로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나 자신은 무엇을 할 것이며 국가와 민족을 위한 승리의 방향타는 무엇일까? 이 엄숙한 테에제를 나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5.16 직후 군정에 의해 의욕에 찬 개혁이 모든 영역에 걸쳐 과감하게 진행되었고 특히 혁명공약 3항에 명시된 부정부패의 근절은 이른바 “쓰레기통의 장미”를 기사회생시키는 캄플주사로서 글자 그대로 청신한 기풍이 제작되는 듯 했다.
세권층의 청교도적 수범을 국민들은 대오각성 속에서 엄숙히 추종해 순결과 근엄의 신풍이 불었다.
그러나 “ 오래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 는 비판의 여지가 오늘날 얼마나 넓어졌는가?
권력과 야합한 부정부패는 악순환을 거듭하며 오도처럼 만연하고 있다.
“가장 혁명적인 사람들도, 모르는 동안에 가장 낡은 전통의 인간이 된다.” 는 로망 로랑의 말은 정말 옳은 것일까?
이제라도 늦지 않다.
혁명초기의 퓨리터니즘으로 온 국민이 복구할 때 민족중흥의 과업은 최단시일에 완수될 것이다.
부정 부패의 근원을 봉쇄하기 위해 나는 막사이사이의 방법을 철저히 수용할 것을 주장한다.
정치제도의 종사자는 관직을 정치적인 목적 자체보다는 개인적 치부의 기회로 악용하려 하고 이에 편승해서 경제제도의 종사자는 영리의 추구에 혈안이 되어 권력을 이윤증대에 악용하려는 두 개의 불순의지의 야합이 전형적인 부정부패의 온실이 되고 있다.
이를 발본색원하기 위해서 고급공무원의 재산공개와 그 등록을 제도화하고 부정축재의 환수를 강력히 법제화하되 용두사미가 되지 않도록 하며 세제상의 역 피라미드가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보다 근원적이요 혁신적인 시책이 이루어져야 한다.
후크국과 함께 부정부패의 일포에도 성공했던 막사이사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국민들이 나를 선출할 때 나의 정책과 서약에 계성해서 투표한 것이다. 내가 모든 힘을 기울여 실행한 것은 나의 이 서약들이었다.”

부정부패의 추방과 함께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해방시켜야한다.
1967년의 올림픽 개막연설에서 멕시코의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대통령은 “스펙타클이즘 보다는 균형있는 질서 균형있는 발전으로 차분한 전진을 지향하자” 는 명언을 남겼다.
이 명연설은 파행적인 발전 양상을 보이는 우리의 실정에 꼭 부합하는 말로서 감명깊게 상기된다.
부의 편재가 빚는 빈부의 편차,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이라는 묵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용단이 필요하다.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르는 부분적인 팽창에 과감한 발란스 메이킹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생산구조는 의연히 자본부족과 실업의 환경 밑에 조건지워지고 산업구조는 비록 공업화에의 시도에 몸부림치지만 아직 후진적인 것이고 무역구조도 아직은 흑자를 많이 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빈익빈 부익부의 언발란스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경제의 자립화와 안정을 이룩하겠다는 우리의 염원을 조속히 성취하기 위해서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배제할 과감한 재분배원칙이 적용되어 마땅할 것이다.
또한 농촌과 도시가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공존공생하는 체제를 시급히 확립해 줘야 할 것이다.
농촌의 도시에로의 급부와 도시의 농촌에로의 대급부가 불균형을 이루자 국민에게 도시편중의 불건전한 가치관을 부여해서 농촌개발의 의욕이 저지되고 있지 않은가.
도시의 번영이 결코 농촌의 희생 위에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파행을 번행으로 이끄는 격차의 해소, 불균형의 시정을 위해서 건전한 시민 모랄로 우리들은 돌아가야 할 것이다.
복지사회 건설을 위해 협동하는 시민정신을 함양하므로서 우선 의식상의 이중구조를 무너뜨려야 한다.
루시언 페이는 국민들의 특성 속에 혁신의 정신, 합리화의 정신, 공공적인 시민의 정신이 깃들이는 태도의 변혁이 선행되지 않으면 근대화를 보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한 진보적인 변혁을 위해 하루 속히 시민 모랄로의 복구가 추구되고 그것은 나아가서 정치풍토개혁의 바탕을 구축해 줄 것이라 믿는다.
그와같은 일련의 현실개조는 우리의 국력을 안으로 굳게 다져놓는 튼튼한 성곽은 이룰 것이다.
70년대의 경제번영과 정치순화에 거는 우리의 기대와 희망에 등을 맞대고 있는 긴장과 불안이 있다.
그것은 70년대의 적화통일을 망상하는 북괴의 전면도발 위기설이다.
호전적인 북괴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우리에게 안전보장은 참으로 중요한 과제이다.
정부는 올해 시책의 초점을 안보와 외교에 두어 통일에 대비한 거국적태세를 갖추고 아시아 집단안보체제의 중추적 역할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핵이빨을 가진 중공의 진출, 북괴의 남침의도와 함께 70년대 안보의 중요성은 아시아 방위의 비미국화라는 닉슨 미대통령의 뉴 독트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 스스로가 그들의 군사방위, 특히 국내안보에 보다 많은 책임을 져야 할 것” 이라는 정책에 따라 미군은 월남에서 철수하고 있다.
또 동북아방위의 거점인 오끼나와 미군기지가 일본에 반환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아시아의 비미국화 정책도 북괴의 전면전 도발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한국의 경우에는 그 특수성이 고려될 것을 우리는 기대한다.
그러나 월남종전이 예상되는 71년 이후에나 제기될 것으로 예상된 미군감축 문제가 최근 대두되고 있고 캄보디아의 혼미한 정세는 언제 타오를지 모를 열전의 불씨를 안고 있다.
어쨌든 우리는 아시아에서의 미군의 점진적인 후퇴에 대비해야 한다. 정부는 그 대비책으로 자주국방을 추구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