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철미의 이야기 /철미의 수필

그리운 수연이에게

최철미 2014. 11. 16. 07:01


가시내야, 그간 잘 있었냐? 며칠전 네가 보낸 편지를 받고, 네가 6 년 동안이나 남몰래 간직해온 러브 스토리를 상상해본다. 가시내, 6년전이면 나 미국오기도 훨씬 전인데, 아무말도 없다가, 이제와서 연애 선언하는 심사는 또 뭔가 싶어 네 속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그 복 많은 남자는 누구일까 싶어 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중학교 2년 단짝친구가, 여고생이되고, 대학엘 가고, 또 산골 국민학교 선생님이 되는 걸 보면서 많은 걸 배웠다. 재잘재잘 말도 많던 중학교 때랑 공연히 심사 울적해지던 사춘기, 대학 시험공부 하느라 낭만, 정서 다 뒤로 하고 교과서만 달달 외우던 여고 시절에도 너랑 만나서, 그 유명한 성심학교 앞 칼국수 집에서 신세 타령할때가 바로 엊그제 같다. 네가 가고 싶던 이대 불문과 갈 성적이 충분했으면서도, 동생 여섯 공부시키겠다고 지방 교육대학 특대생으로 가던 널 보면서 나는 안타깝기도 했고, 한 편으론 그런 네가 우러러 보였다. 참고서에 찌들던 재수생 시절에도 넌 간간히 격려 편지와 전화로 날 북돋아 주었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풍비박산이 난 집안일로 어쩔줄 몰라하던 내 앞에서, 넌 차분히 내 애길 들어주곤 했었다. 


삶이 지겹게 여겨질 땐 장터엘 가보라던 너의 충고를 따라, 해 저물 무렵의 남대문 시장을 지척없이 방황하곤 했었다. 콩나물 백 원 어치를 더 달라 덜 주마하고 서걱이는 여인네들을 보면서, 단돈 오백 원에 품 파는 지겠군 아저씨들을 보면서, 나의 방황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가를 절감하고 돌아오는 나의 등 뒤엔, 언제나 네가 서 있었다. 


미국 오기 몇 주전에 고속버스 터미날에서 잠깐 만난 너는, 담담히 네 아버지의 실직 얘기를 들려주었고, 생활비를 대느라 애들 몇 명을 모아 과외 공부를 한다고 했다. 그 때, 왜 나는 네가 그렇게 커 보였는지 몰라.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성숙'이 아니었나 싶구나. 네가 졸업을 하고 국민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 되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시험공부하고, 숙제 내야하는 학생이었다. 말이 딸리고 힘겨운 학교 생활에다, 피곤한 직장 생활 속에도 난 항상 널 떠올리면서 날 달래곤 했다. 넌 여름방학이면 아르바이트하기에 바빴고, 학기 중에도 그랬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살아서 뭐하냐고 내가 물으면 넌 그저 배시시 웃기만 했다. 네 눈동자밑으로 깔린 우수가 그저 멋있어만 보이던 옛날의 내가, 지금은 부끄러워진다. 


고등학교 시험이 끝나고 나서, 큰 맘먹고 산 바나나 반쪽씩을 베어 물고 시가지를 활보하던 생각이 나냐? 우정이 변치 말자고 다짐하면서 네가 사주던 이백 원짜리 플라스틱 반지를 가끔씩 쳐다본다. 지금도 시장 보다 말고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바나나를 물끄러미 쳐다볼 때가 많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나는 너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팔복로 시가지를 걷는다. 중앙동 한복판을 거닐며 상점가를 기웃거리고, 가끔마다 호떡이랑 떡볶이랑 군것질 거리를 찾아 이곳저곳 포장마차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전주천 버드나무 밑에 앉아 네 사랑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지금은 돌아갈수 없는, 그 먼 추억으로 이끄는 건 무엇일까. 

 
보고싶다.

너희반 꼬마들 등쌀에 볶이겠지만, 네 사랑하는 님과 보내는 시간 틈틈이 잘 있다는 편지나 종종 보내라.
늘 건강하고 잘 있어라. 

안녕. 


1988년 3월 5일

그리운 친구로부터


(1988년도에 나온 Cal State Hayward University Korean Student Association 문집에 실었던 편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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